책 이야기550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 이연주 ㅡ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세계 고산도서관 신간 코너에 파란색 표지에 책 제목이 눈에 띄어 집어든 책. 380쪽의 두꺼운 책이지만 단숨에 읽었다. 일단 저자가 글을 정말 쉽게 잘 쓴다. 법률 용어가 더러 등장함에도 마치 뉴스나 드라마를 보듯이 각각의 사례를 빠져들어 읽게 된다. 뉴스에서 실명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검사들도 꽤 등장한다. 책의 모든 내용은 사시 출신의 저자가 검사로 재직하며 겪은 이야기다. 한 편 한 편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해서 여기 줄거리 요약을 못하겠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한 마디로 이런 양아치 집단이 없다. 검찰이 썩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들은 치외법권의 세계에서 함부로 법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권력을 사유화할 뿐 아니라 그 조직의 생리에 반하는 이들에겐 끝까지 복수한다.. 2021. 2. 17.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 강신주 — 인문학의 궁극적 지향은 자비의 실천 저자의 그간 매력적인 철학대중서들에 비하면 이 책은 좀 심심한 편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설파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저자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담긴 저서라고 봐도 좋겠다. 저자는 인문학적 시야의 핵심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자비의 실천을 강조한 불교 사유가 예로 많이 등장한다.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이 세계에 많은 폭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겸허한 태도로 최소의 폭력을, 고통을 감소시키는 길을 모색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윤리이다. 삶의 무상함과 덧없음에 대한 인식 또한 허무가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통로로 존재한다. 그래서 저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한 공기의 .. 2021. 2. 14. 스피노자의 뇌 | 안토니오 다마지오 — ‘느낌’의 메커니즘을 추적한 책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신체일까? 마음/생각/영혼일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왔을까? 과거에 철학이 이 물음에 답해왔다면 오늘날에는 뇌과학이 이에 관한 열쇠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먼저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인간 뇌의 3층 구조를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뇌의 구조는 우리 존재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생명현상을 담당하는 원시뇌로 파충류의 뇌로 불리는 뇌간과 감정을 담당하는, 표유류의 뇌로 불리는 구피질과,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신피질로 나뉘어져 있다. 이 뇌의 3층 구조는 차례차례 발달해왔기에 인간의 진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생명 현상, 감정, 이성의 영역 중에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온 것은 무.. 2021. 2. 9. 정말 못 쓰겠다 싶을 땐 9칸 글쓰기 | 야마구차 다쿠로 글을 쓴다는 건 기본적으로 낱낱의 정보들을 흐름이 있게, 기승전결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글 쓸 내용이 있을 때 그런 것이고, 많은 이들이 그 이전에 글을 쓸 ‘내용의 빈곤’에서 길을 잃는다. 이 책 ‘9칸 글쓰기’는 주제에 대한 기본 질문과 심층 질문으로 글의 내용을 생성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충분히 검토했을 때 비로소 내용을 흐름에 따라 구조화해서 엮어갈 수 있다. 쓸 내용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쉬운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 2021. 1. 25. 꽃들에게 희망을 | 트리나 포올러스 ㅡ 인생책 연말이면 책을 보내주는 지인이 있습니다. 올 겨울에 받은 책은 잘 알려진 고전, 리커버판입니다. 짧은 우화 속에 인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삶의 위대한 가능성을 동시에 새겨넣은, 고전 중의 고전이죠. 이야기속엔 줄무늬, 노랑이, 이렇게 두 마리 애벌레가 등장합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세상에 태어나 목격한 모습은 이렇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이 모두 줄을 지어 어딘가로 가고 있습니다. 한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진 애벌레들의 행렬, 그 행렬 끝에는 놀랍게도 거대한 애벌레 기둥이 있습니다. 애벌레들이 높은 데로 올라가려고 서로의 몸을 밟고 밟으며 만들어낸 기둥이죠. 기둥 위엔 뭐가 있는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줄무늬는 호기심에 기둥에 뛰어들지만 거기서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차마 노랑이를 밟고 올라서.. 2021. 1. 21. 소유나 존재냐 | 에리히 프롬 — 소유가 구원인 사회에 던지는 질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진정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모든 저작은 그 물음을 향해 있다. 그 화두가 마음에 남아 내가 대학 시절에 제일 좋아한 작가다. 다른 철학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프롬은 술술 잘 읽혔다는 이유도 한 몫 했다. 프랑스 등 대륙쪽 철학자들의 현학 과시가 없고 문장이 간명하다(푸코, 들뢰즈 등은 대학원에서 읽었는데, 학부 수준에서는 혼자 읽기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식의 깊이가 얕지 않다. 철학책을 해설서 말고 1차 텍스트로 읽고 싶은 분께 추천하는 작가다. 이십 년도 더 지나 노랗게 색이 변한 를 다시 읽었다. 예전에 이 책이 바람직한 사회 혹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마땅하고 아름다운 진술로 읽혔다면, 지금은 우리 사회의 절실한 문제로 다가온다.. 2021. 1. 14. 죽은 자의 집 청소 | 김완 — 이보다 더 쓸쓸하고 아플 수는 없다 새해 첫날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1월 1일 저녁, 이 책을 펼쳐둔 이유는 빌려놓은 새 책이 이것 뿐이어서였어요. 학교도서관에서 약 한 달쯤 전에 빌렸는데 그때는 두 꼭지를 읽고는 큰 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습니다. 내용이 너무 무거워서 단숨에 읽어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책상 위에 한 달간 놓여 있다가 다시 집어든 책입니다. 저자는 특별한 종류의 청소 서비스를 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홀로 자살하고 뒤늦게 발견되어 방치된 집을 그 모든 냄새와 흔적을 지우고 새집처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인데요. 그래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가장 그늘진 삶의 마지막 흔적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닥의 핏자국을 지우고 벽을 닦고 온갖 물건을 치우며 가족보다 더 세세히 죽은 이의 삶의 마지막 조각들을 보게 되죠.. 2021. 1. 2. 조선, 1894년 여름 | 에른스트 헤세-바르텍 — 격변의 시대에 조선을 여행한 오스트리아인 1894년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죠. 세도정치 백 년 끝에 이미 나라는 허물어지기 직전, 민초들의 마지막 개혁의 몸부림인 동학농민전쟁을 진입하려고 조정이 외세에 끌어들여 이 땅에서 청일전쟁까지 벌어졌죠. 그 격변의 시대를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여행기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귀족, 헤세-바르텍의 기록인데요. 헤세-바르텍은 세계일주 여행 중에 일본에 들렀다가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배를 타고 부산항에 내립니다. 청일전쟁의 위협 때문에 조선을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지는 못하고, 배로 제물포까지 가서 서울과 인근 도시들을 여행하고는 아쉬움을 삼키며 일본으로 돌아가는데요.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여행기라기보단 민속지라 생각될 만큼 매혹적인 보고서입니다. .. 2020. 12. 31. 나라말이 사라진 날 | 정재환 — 한글로 나라와 문화를 일으키다 "대일본 황국신민으로서 조선말은 무엇 때문에 연구하며, 조선글은 무엇 때문에 연구하느냐? 철자법은 통일해서 무엇을 하며, 표준어는 사정하여 무엇에 쓰자는 것이냐? 한글 잡지는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내며, 조선말 사전은 무슨 필요로 만들자는 것이냐? 한글날은 무슨 뜻으로 기념하며, 한글 노래는 무슨 의도로 지어냈느냐? 여름마다 각지로 다니면서 한글 강습은 왜 하는 것이며, 틈틈이 기회만 있으면 학술 강연을 ㄹ빙자 삼아 눈가림의 집회는 왜 자꾸 하려 하느냐? 신문 잡지에 이러이러한 글은 무슨 의도에서 써냈으며, 사전 원고에 이러이러한 문구는 고의적인 민족사상의 고취가 아니냐?" -- 일제 고문경찰의 취조, 책에서 우연히 책광고를 보고 북펀드에 참여한 책.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2020. 11. 9. 심신단련 & 깨끗한 존경 | 이슬아 ㅡ 일상을 소설처럼 재미나게 이야기하기 세바시에서 이슬아 작가가 강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젊은 친구 치고는 글쓰기에 대한 철학이랄까 통찰이 놀랍구나 싶었다. 자신이 매일 쓴 수필을 이메일로 발송하고 한 달에 만 원의 고료를 받는다는 발상도 참신했다. 언젠가 기회 되면 이 분 책을 한 번 봐야겠다 싶었지만 이삼십대의 관심사가 나와 겹치는 부분이 크게 있을까 싶어서 책을 사진 않고 이름만 기억해둔 작가다. 마침 어제 후배가 이슬아 작가가 쓴 두 권의 책을 빌려주었다. '심심단련'은 수필집이고 '깨긋한 존경'은 인터뷰집이다. 한 권의 수필을 금새 읽으면서 놀랐다. 젊은 친구가 필력이 대단하구나 했다. 일상 이야기는 사실 공감을 불러오긴 쉽지만 그만큼 흔하고 우리의 주의와 관심을 크게 끌지는 않는다. 그런데 작가는 일상의 작은 일들을 그만의 섬.. 2020. 10. 7. 조선과 일본에 살다 | 김시종 ㅡ 재일조선인 작가의 해방 전후사에 대한 특별한 기록 한 소년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 황국신민을 꿈꾸던. 그는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웠고, 일본 창가의 서정성에 매혹되었으며, 일어를 잘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3.1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던 아버지와 점점 멀어졌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태평양전쟁에 자원 입대하려 했으나 단 하나뿐인 아들을 죽게 놔둘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로 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내심 아쉬워한다. 시대가 그랬던 탓에 소학교에서 학생들은 조선어 수업을 하찮게 여겼다. 그마저도 나중에는 없어지고 말았지만. 조선어를 가르치던 선생은 두상이 좀 삐딱해서 외모 때문에 더욱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그런 선생이 어느 날 교실에서 펑펑 통곡하는 일이 벌어진다. 시험 날이었다. 그림을 보고 '잔치를 합니다'라는 문장에서 '잔치'.. 2020. 10. 4. 어른의 어휘력 | 유선경 — 우리말 어휘의 섬세한 ‘말맛’을 전하는 책 서문에서부터 혹했다. 우리는 말하면서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건망증인가 한다. 어떤 이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 복장 터지거나 누군가를 눈치 없다고 타박할 때도 종종 있다. 저자는 단언한다. 이 모든 경우는 건망증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휘력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모르는 단어가 이렇게 많나 놀랐고, 과연 내가 국어 선생이 맞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저자가 표현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맛있는 음식을 먹듯 꼭꼭 씹어 먹었다. 나는 '샅샅이'는 아는데, '손샅'과 '발샅'은 몰랐다. 손가락 사이의 살을 '손샅', 발가락 사이의 살을 '발샅'이라고 한단다. 그래서 그런 작은 틈새까지 다 살피는 것을 '샅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해낙낙하다, 잠포록하다.. 2020. 9. 9. 당신이 나의 백신입니다 | 김동은 _ 의사가 쓰는 코로나 현장 이야기 저자가 의대에 진학할 때 고3 담임교사가 "인간미 있는 의사가 되라"고 하셨다고 한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정말 한 인간의 깊은 향기가 여운으로 남았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문체, 문제상황에서 모두를 위한 올바른 해법을 고민하는 겸허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더없이 따스한 눈길과 손길. 이런 분이 우리 곁에 살고 있었구나 싶다. 부담 없이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글 속에 그런 문장과 닮은 평온하면서도 올곧은 한 의사의 삶이 전해지는 책이다. 1부, 대구 코로나 사태 중에 일한 경험을 읽으며, 의료진은 물론 폐기물을 처리하는 청소노동자까지 수많은 분들이 얼마나 애썼는가를 알게 되었고, 나머지 4부까지 읽으며 이분의 삶의 풍경 속에서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병과 노쇠, 죽음,.. 2020. 9. 6. 교사를 위한 교육학 강의 | 이형빈 ㅡ 이론과 현장을 연결한 최고의 교육학 개론서 언젠가 이런 책이 나오길 바랬다.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교육학 이론을 현장과 연결해서 쉽게 설명하는 책이 나오면 좋겠다 했는데 올해 나왔다. 저자가 현직 교사로 꽤 일하다가 교수로 옮겨간 사람이라 가능한 것 같다. 이 책에는 우리가 대학에서 이름을 들어본 거의 모든 교육학자들이 한 번씩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교육과정-수업-평가 혁신을 위한 교사의 전문성], [혁신교육에 대한 철학적.사회학적 성찰]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교사가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머뭇거리게 되는 모든 지점들을 친절히 짚어가면서 교육과정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교육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현장의 문제를 골고루 건드리되 이를 관련 이론/철학과 함께 개념화한다. 그래서 이다. 교사.. 2020. 9. 3.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 고미숙 ㅡ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존재의 조건 아주 재밌거나 신선한 책은 아니었다. 그간 고미숙 씨의 책을 꽤 봐와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한 가지에는 찬탄하게 된다.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길게, 몇 백 페이지를 할애해서 예찬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 무언가에 이렇게 깊이 감탄하고 그 내용을 풀어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기억에 남는 몇 부분을 적어본다. ## 배운다는 건 곧 책을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책과 신체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을 일러 교육이라 한다. 그래서 독서를 취미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취미활동을 그렇게 오래,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책은 삶의 토대이자 존재의 조건이다. 책과의 만남이 있고 그 위에서 인생이라는 길이 .. 2020. 8. 30.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3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