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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173

케이프타운 3. 채소재배에서 시작된 식민지의 역사, 컴퍼니즈 가든 포르트갈 선원들은 희망봉 근처의 케이프타운을 아시아로 가는 긴 항해에서 잠시 거쳐가는 곳으로만 여겼다. 그들은 여기서 원주민과 필요한 물자를 물물교환하고 인도와 동남아로 떠났다. 케이프타운에 백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희망봉을 발견한 지 백 오십 년이 더 지난 뒤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직원을 상주시키면서 점차 정착민이 생긴다. 초기 정착민은 네덜란드계로 보어인(농부라는 뜻)이라 부른다. 동인도회사는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원주민에게 의지하지 않고 직접 공급하길 원했다. 멀고 긴 항해에서 괴혈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비타민 공급은 필수였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밭을 일구어 유럽에서 먹던 채소를 기르는 것이었다. 사진은 케이프타운 중심가에 있는 컴퍼니즈 가든. 유럽인들이 채소 재배.. 2019. 7. 18.
케이프타운 2. 희망봉에 가다 남아공의 7월은 겨울이라 날씨가 좋지 않았다. 계속 흐리거나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엔 일주일 중 딱 하루가 맑은 날이었고 하루가 구름과 해가 왔다갔다 했다. 또 하루는 저녁에만 맑았다. 우리는 맑은 날 단 하루를 희망봉에 쓰기로 했다. 그래서 돌아오기 전 날, 희망봉으로 떠났다. 희망봉이 있는 케이프반도는 케이프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시티투어 버스로 한 시간쯤 걸린 것 같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가는 길의 풍광도 좋았다. 케이프타운 여행 중 가장 시원하고 멋진 자연이 펼쳐졌다. 이쪽 길은 렌트카로 자유롭게 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렌트카를 계획했는데, 렌트비는 무지 싸지만, 보증금으로 백만 원 정도를 더 냈다가 한 달 뒤에 돌려받는 구조인데다 주차 문제도 있고 해서 우버를 이.. 2019. 7. 18.
케이프타운 1. 중부 아프리카에서 남부 아프리카로, 케이프타운과의 만남 르완다 키갈리에서 케이프타운까지는 7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한 시간 쉬어갔으니 비행 시간은 6시간이다. 요하네스버그까지는 4시간인데 케이프타운은 두 시간이 더 걸렸다. 아프리카 중부에서 남부까지 이렇게 멀다니! 북아프리카 이집트에서 케이프타운까지는 한국에서 유럽 가는 시간만큼 걸릴 것 같다. 우리나라에 있을 땐 아프리카 대륙이 이처럼 크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유럽과 인도를 합친 것만한 크기이다. 동부 아프리카와 서부 아프리카의 거리는 한국과 동남아보다 더 멀다. 대한항공은 에볼라가 돌 때 이때다 하며 수지가 안 맞는 케냐 나이로비 직항편을 없앴지만, 사실 에볼라가 기승을 부린 지역과 케냐는 한국과 동남아 정도의 거리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남아프리카에 왔다. 아프리카 최.. 2019. 7. 16.
킬리만자로, '하얗게 빛나는 산' 언저리에서 중년이 되며 문득 나이 들었음을 실감할 때가 있다. 대개 체력 문제다. 킬리만자로를 보며 삼십대였다면 산에 오르지 않고는 못 배겼을텐데, 지금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다니!!! 정상 등반에는 최소 5일이 필요하고 6일 정도면 더 좋다. 일정상 그만한 시간도 없었지만, 시간이 있었더라도 등반은 못했을 것 같다. 네팔 안나푸르나 4천미터에서 고소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5천미터 이상 오르는 건 이제 엄두가 안 난다. 게다가 킬리만자로는 화산이다. 화산은 정상까지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다. 이래저래 자신이 없어서 바라보는 걸로 만족. 물론 만족은 되지 않으나 만족하기로. 킬리만자로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은 모시였다. 한적한 마을이다. 숙소를 킬리만자로산이 조망되는 우후루 호텔로 정했다.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 2019. 7. 13.
살아남은 이들과 사라진 이들 16세기 이래 천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로 끌려갔다(당시 지구 인구를 고려하면 더욱 어마어마한 수치다). 아프리카인들은 수십 세대에 걸쳐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 와서 가장 불운한 쪽은 아프리카계 흑인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이 되었다. 현재 미국엔 아메리카인디언보다 아프리카계 흑인이 훨씬 많다. 아프리카계 흑인은 인권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지만 원주민의 처지는 그보다 못하다. 캐나다에선 이제야 이뉴잇을 대상으로 한 학살과 인종차별에 대한 보고서가 나오는 형편이다. 쿠바 등 카리브해 연안 국가에서 원주민은 사실상 멸족되었다. 유럽인이 옮긴 전염병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이 지역엔 원주민보다 끌려온 흑인노예의 후손이 더 많다. 아프리카가 빈곤과 내전을 비롯한 .. 2019. 6. 26.
아프리카에서 조선을 상상하다 여행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이 바뀌면 시간 감각도 달라진다. 동남아가 우리의 70, 80년대를 연상케 한다면 아프리카는 우리의 시선을 좀 더 멀리, 백 년 전으로 향하게 한다. 아프리카는 산업화가 되기 전, 우리 모두의 과거를 상상하게 하는 땅이다. 여기도 도시와 시골의 격차가 커서 도시 부유층은 모든 걸 누리지만 시골 사람들은 몸을 누일 집과 간단한 조리도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산다. 흙집에서 살고 세 끼를 다 챙겨먹지 못했으며 가구나 물건을 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구한말 우리 조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이해가지 않는 것은, 백 몇 십여 년 전 조선은 부족 중심의 아프리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문명국가’에다 사람들의 재주와 솜씨도 뛰어났는데 서민들의 물질적 삶이 왜 그렇게.. 2019. 6. 26.
잔지바 (3) ㅡ 잔지바의 매력은 잔지바에 도착해서 두 번 놀랐다. 처음엔 유명 관광지치고 유적이나 유물 관리가 너무 엉망이어서다. 화장실 냄새가 진동했던 공항청사에서부터 의아함이 시작되었다. 스톤타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도 집들은 죄다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손 본 흔적이 거의 없었다. 깨끗한 건물은 호텔로 리모델링한 곳 뿐이었다. 괜찮은 역사적 포인트가 꽤 있는데, 박물관의 유물 관리도 한숨 나오는 수준이었다. 잔지바를 마지막으로 다스렸던 왕실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은 입장료가 얼마인지 쓰인 안내판조차 없었다. 우리는 관리인이 달라는 대로 주었다. 유물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잔지바 사진은 볼 만했다. 당시 항구였던 곳에 세워진 하얀 건물은 지금 힐튼호텔로 개조되어 있다. 바닷가 근처 요새로 .. 2019. 6. 26.
잔지바 (2) ㅡ 노예무역의 어제와 오늘 아프리카에 오기 전엔 노예무역이라고 하면 그저 백인들이 흑인들을 많이 잡아갔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의 절반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16세기 이후 대서양 노예무역이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그 이전 시대에도 아프리카 사람들은 북아프리카, 중동, 인도 등지로 노예로 팔려갔다. 그리고 이 노예무역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은 아프리카 사람들이었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노예사냥꾼들과 유럽 혹은 아랍 노예상인들 상호간의 이익이 맞아떨어져서 이루어졌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전쟁에 진 다른 부족 사람들을 이들 백인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이익을 챙겼다. 노예에 대한 수요가 있었고 노예사냥꾼들에게 총기를 지급한 건 유럽인이었으므로 이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아프리카 .. 2019. 6. 26.
잔지바 (1) ㅡ 슬픈 번영의 흔적, 잔지바 낯선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놀라게 되는 건 그곳의 자연과 지리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장소는 내가 그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열어주고 그때마다 내가 지닌 상식의 얄팍함애 놀라게 된다. 잔지바도 그런 장소였다. 인도양의 이 아름다운 섬을 방문하기 전, 그저 아프리카의 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고 다녀온 분들이 좋았다 해서 여행지에 끼워넣은 거였다. 잔지바에 와서야 나는 이곳이 과거에 오만제국의 수도였음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만의 지배를 받았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잔지바르가 동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흔히 노예무역 하면 대서양 노예무역만 떠올리기 쉽지만 노예무역의 경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서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후추, 설탕 등의 향신료가.. 2019. 6. 26.
세렝게티 5 ㅡ 전통을 고수하는 아프리카의 마지막 부족, 마사이 응고롱고로 분화구를 떠나면서 운전사가 마사이 마을을 볼 거냐고 물었다. 여행 전 자료조사를 할 때 마사이마을 투어가 별로라는 평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처음엔 방문 계획이 없었는데, 길 옆에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의 모습을 보니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일대에서 방문 가능한 마을은 두 군데라고 했다. 한 곳은 이미 지나쳐서 우리는 그 다음 마을을 방문했다. 사파리 차량 한 대당 50불이 관람료였다. 원래 마사이족은 케냐와 탄자니아 전역에 살았다. 19세기 말 영국군의 진격으로 안햐 비옥한 땅을 잃고 세렝게티 일대에 모이게 되었다. 세렝게티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그 안에 살던 마사이족은 응고롱고로 보존지구로 이주했다. 세렝게티엔 사람이 거주할 수 없고, 응고롱고로 보존지구에는 마사이족만 거주를.. 2019. 6. 26.
세렝게티 4 ㅡ 응고롱고로에서 만난 검은코뿔소 세렝게티를 떠난 우리는 저녁 나절이 되어 응고롱고로의 심바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장은 분화구 높은 지대에 있었다. 분화구 일대의 전망은 없었지만 평평한 언덕 위로 저녁 햇살이 밝게 들이치는 멋진 장소였다. 비수기라 사파리 팀은 우리 말고 딱 한 팀이 더 있었다. 그래서 마치 캠핑장 전체를 우리가 전세낸 듯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캠핑장을 가로질러가는 코끼리 가족을 만났다. 어미와 새끼 두 마리, 총 세 마리였는데 그 중 한 녀석이 무척 겁이 많았다. 마침 출발하는 다른 팀의 사파리 차량 소음을 듣고 한 마리가 부리나케 숲으로 숨었다. 어미가 아무리 부르고 기다려도 그 녀석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어미와 새끼 한 마리는 총총이 건너편 숲으로 갈 길을 갔고, 5분이 지나서야 숲에 숨.. 2019. 6. 26.
세렝게티 3 ㅡ 우리가 잊고 있던 지구, 세렝게티 국립공원 먼 길을 힘들게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세렝게티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더 들어와야 하는 멜리아 세렝게티 롯지는 그만큼 더 고요하고 장엄한 장소에 있었다. 대평원 한가운데 언덕 위에 자리잡아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주위에 다른 인공물은 아무 것도 없어서 아침에 눈을 뜨니 마치 캠핑을 하는 것처럼 대자연 속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비수기라 다른 숙박객이 없어서 더욱 한적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성수기의 3분의 1 가격에 묵을 수 있었다. 세렝게티의 풍광은 물론 특별하다. 하지만 지구엔 이보다 훨씬 장대하고 다이나믹한 풍경이 많다. 세렝게티의 특별함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존재들, 그 생명의 깜박거림 때문이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있겠지만, 내 .. 2019. 6. 22.
세렝게티 2 ㅡ 생명의 반짝임 잠시 잠깐 에덴동산에 다녀온 느낌. 세렝게티에서 보낸 24시간에 대한 내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멀리서 보면 단조롭고 다소 황량해 보이는 사바나의 풍경이 한 발 안으로 들어서니 밤하늘의 별빛처럼 생명의 반짝거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자, 코끼리, 임팔라, 기린, 타조, 표범, 버팔로, 얼룩말, 하마, 하이에나..... 수많은 동물을 만났지만 가장 경이롭고 충격적인 만남은 초원을 가득 메운 와일드비스트(누)와 얼룩말 무리다. 나비게이트를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우리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시야가 닿는 모든 들판 위로 거대한 동물의 무리가 풀을 뜯거나 지나가고 있었다. 수만 마리는 족히 본 것 같다. 세렝게티에 와일드비스트가 백만 마리 이상, 얼룩말이 이십만 .. 2019. 6. 20.
세렝게티 1 ㅡ 세렝게티 가는 길 비행 내내 세렝게티 대평원이 내려다보였다. 르완다 키갈리에서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공항으로 향하는 아침 비행기는 세렝게티 대평원 바로 위로 지나간다. 운좋게도 날씨가 화창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세렝게티는 연두빛과 초록빛이 듬성듬성 섞인 황토빛이었다. 르완다의 오밀조밀한 산들만 보다가 광활한 대지를 보니 이제야 진짜 아프리카에 온 것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비행기가 세렝게티 평원 위를 한참 지날 무렵,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지금 비행기가 응고롱고로 분화구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방송이었다. 날씨가 좋아 킬리만자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킬리만자로의 두 봉우리 키보(5895m)와 마웬지(5254m)가 구름 위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킬리만자로 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2019. 6. 19.
탄자니아의 첫인상 탄자니아에 도착했을 때 르완다와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무언가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온화하고 좀 더 여유로웠다. 그때 알았다. 르완다가 조금 경직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탄자니아는 르완다보다 쓰레기도 많고 거리도 지저분하지만 뭔가 사람 사는 동네 같은 느낌이 있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치안이 가장 안전한 편인데 도처에서 경찰이 지키기 때문이다. 제노사이드 여파로 국경지역엔 아직도 반군이 출현하니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게 이해가 간다. 탄자니아는 달랐다. 시원스레 펼쳐진 평원만큼이나 분위기도 자유롭고 편안했다. 알고보니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에서 쿠데타와 내전을 전혀 겪지 않은 아주 드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초대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경제는 말아먹었다는 평이 있지만 120개나 되는 .. 2019.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