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408 이 시대 종교의 가치 대림절 동안 주말마다 아기 탄생을 기리는 구유가 나를 맞이했다. 이천 년 전 사건의 당사자는 마리아와 요셉, 동방박사 뿐이지만, 온 세상이 한 아기의 탄생을 지켜보고 기뻐한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생명의 탄생 그 자체를 축하하는 의미로, 또 우리 삶도 새로워질 수 있다는 기쁨으로 확장된다. 이 시기면 늘 우리 삶에도 밝고 좋은 것들이 탄생하기를 잠깐이지만 소망하게 된다. 우리들의 365일, 평범한 일과는 대부분 일과 휴식으로 채워져 있다. 일이 고된 만큼 그 보상을 위한 휴식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쾌락적인 소비로 채워질 때가 많다. 일과 휴식 너머, 삶의 본질적 가치랄까,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때때로 찾아오는 여유는 스마트폰이 모조리 실종시켜 버린다. 이런 시.. 2023. 12. 30. 행복은 OO에서 온다 철학자 한병철 선생은 행복은 '손'에서 온다고 말한다. 행복도 사유도 수작업이라고. 기쁨과 행복을 비교한다면 기쁨은 그저 정신적인 것일 수 있지만 정원 가꾸기든 악기 연주든 글쓰기든 행복은 내 몸을 사용해서 얻는 감각에 가깝다고. 그 말을 들으며 행복은 좀 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게 행복은... 자전거에서 온다.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자마자 기쁨이 찾아오고 그 기쁨은 지속적이면서도 반복적인 것이니까. 유발 하라리가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물질과 산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현대지만 고대에 비해서 인류의 행복이 더 증가하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기대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이 깊은데 삶의 기준과 기대는 꾸준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본다면 지금은 지상낙원이지.. 2023. 12. 14. 시간을 내 편으로 1. 상담 치료를 끝내는 날, 그동안 감사했다고 선생님 덕분이라고 하자 의사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 "시간을 자기 편으로 만드셨기 때문이에요." 그 말이 참 좋았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는 말. 2. 한때 '꽃길만 걸으세요' 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인생에서 꽃길만 걷기는 불가능하다. 설령 꽃길만 걷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는 그것이 꽃길인 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길이 얼마나 행복한지도 모를 확률이 높다. 우리가 삶을 인식하는 방법은 언제나 여러 상황에서의 비교를 통해서이고 등산할 때 정상에서의 기쁨과 황홀감이 큰 이유는 그 전에 힘들게 오르막을 올라왔기 때문이니까. 아무튼 구불구불 바윗돌, 큰 돌, 작은 돌, 때론 평평한 길, 수많은 길을 날마다 걷는 우리들에게 있어 사는 게 힘들 때면 누군가 내 편.. 2023. 12. 11. 버스정류장 단상 며칠 전 버스를 기다리다 문득 생각했다.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부의 끌어당김 법칙 이런 것 말고, 온 우주가 나를 돕는다는 말은 리얼한 진짜라고. 날씨가 모처럼 따뜻해 만촌네거리에서 집까지 걸어가던 길이었다. 충분히 걸었다 싶은 순간, 남은 구간은 버스를 타려고정류장의 안내판을 들여다보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걸 만든 분도, 이걸 손수 붙인 분도 계실 터,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고마운 건 안내판 뿐만이 아니다. 시간 맞춰 도착하는 버스와 도로를 만들어준 분들과 주변 모든 것들의 도움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말 그대로 일체중생의 은혜다. 이런 것들을 손수 만든 분들의 노동을 폄하하는 일이 없는 사회가 되길 아울러 소망했다. 2023. 11. 26. 목걸이는 이제 그만 바다 건너 멀리서 도착한… 아니 멀리서 쿠팡에서 주문하신 생일 선물 도착. 지금 몇 년째 비슷한 모양의 목걸이를 받고 있는데 울 식구님은 자기가 뭐 선물한지 까먹으시는 모양… 오늘 물었다. 왜 자꾸 거의 같은 걸 선물하냐고. 이유를 알았다. 쿠팡에서 젤 인기 있는 걸 상위 목록에 검색되는 걸 그냥 사심.. ㅋㅋ 다시는 목걸이 사지 말라고 했다. 비슷비슷한 게 다섯 개는 되는 듯… ㅎㅎ 2023. 11. 26. 장미가 피고, 겨울이 오고 며칠 전 경산 이마트 부근을 지날 때였다. 코끝을 찌르는 장미 향에 놀라 향수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붉은 장미가 여기저기 피고 있었다. 11월 초까지 이어진 이상 고온에 계절을 착각하고 이 세상에 나온 꽃들이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잎 사이로 피어난 장미꽃도 일품이었지만 어떤 나무는 아직 푸르디 푸르러서 사진만 보면 6월인 줄 알겠다. 그것도 잠깐, 그저께부터는 한겨울 날씨가 찾아왔다. 예년보다 훨씬 고온이더니 또 예년보다 훨씬 추운 날씨다. 사흘째 되는 오늘, 이제 조금 적응이 되어 추위가 덜했다. 움직이는 동물과 달리 식물의 변화는 느리고 미세하지만 계절에 반응하는 모습은 급진적이고 경이롭다. 비록 계절을 잘못 선택해 곧 서리를 맞을 장미지만 언제든 꽃필 준비를 하고 있다가 날씨가.. 2023. 11. 13. 풀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계절이 어느덧 11월에 이르렀다. 베란다의 일년살이 식물도 날이 쌀쌀해지며 잎이 다 시드는 계절이다. 뿌리만 남아서, 혹은 씨앗만으로 겨울을 날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끝까지 감동을 준다. 이미 잎이 다 말라버린 지금도 끝까지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잎이 다 진 봉숭아에는 마지막 꽃잎이 시들어가는 방울토마토에도 마지막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강추위가 닥치는 마지막 그날까지 어떻게든 활짝 꽃피려 하는구나 한해살이 식물이 지닌 생명의 몸짓에 감탄하는 11월이다. 2023. 11. 9. 삶은 힘겨운 생존의 장일까, 신의 선물일까 이십 년 넘게 해마다 들은 이야기가 있다. 대졸자 취업이 힘들다는 이야기. IMF 직후 대학을 졸업한 나로서는 이후 같은 이야기를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다. 물론 가장 어려운 시기는 지금일 것이지만. 특히 이십대 자녀를 둔 분들의 걱정은 산처럼 두텁다.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지만 앞날이 불확실하여 생존에 대한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간다. 이런저런 걱정거리들을 주변에서 듣는 요즘, 그 걱정을 넘어설 수 있는 건 신앙 뿐이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신앙심이란 신이라는 절대자를 믿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이란 삶을 고단한 생존투쟁으로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힘겨운 날들은 많지만 근본적으로 삶을, 주어진 이 시간을 선물로 여.. 2023. 11. 8. 오랜만의 캘리 연습 원래 캘리그라피는 글자를 붙여써야 이쁜데 내용이 잘 전달되라고 걍 띄어씀. 그림은 솔직히 유치한 수준. 걍 멋대로 그렸다. 좀 배워볼까 싶은데 귀찮아서… 2023. 11. 8. 김탁환 작가 북콘서트 후기 평소 좋아하는 작가인데 처음 만났다. 신작 '사랑과 혁명' 북콘서트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 책을 쓸 무렵 작가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곡성에 정착한다. 곡성에서 농사 짓고 섬진강과 자연을 벗하며 산 시간이 소설 구성과 내용에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작가가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이들은 곡성의 옹기꾼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지도부는 와해된다. 정약용 삼형제가 순교하거나 귀양을 가게 된 게 이때다. 남은 신도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진다. 그들이 서울에서 가장 멀리 내려와 정착한 곳이 바로 곡성이다. 곡성까지 내려온 거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그들의 신분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 다양했지만 곡성에서 그들은 평등을 이룬다. 옹기꾼이라는 천민으로. 모두 천민이 되었다... 2023. 11. 6. 대구 시내 성지 스탬프 찍기, 순례에 대하여 축복장 받으려고, 축복이란 말에 이끌려 시작한 서울 순례길. 순례를 마치고 우리 지역의 성지도 다 못 보았구나 싶어서 주말 이틀에 걸쳐 대구 시내 성지 9군데를 돌았다. 계산성당, 성모당 등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곳도 새로웠고, 새방골, 비산, 복자성당은 처음이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함 둘러봐야지, 스탬프나 다 찍어봐야지 그렇게 시작한 걸음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군데 두 군데... 아홉 군데 성당을 거치면서 뭔가 마음에 살랑살랑 다른 기운이 스며들었다. 신앙심이 없이 시작한 길이었는데 길의 풍경이 쌓이고 쌓이면서 마음에 신선한 바람이 새로 불어오는 기분이었다. 대구 순례의 마지막은 복자성당이었다. 그 앞을 지나친 적은 있지만 들어가보긴 처음이었다. 울 엄마아빠가 결혼한 곳.. 2023. 10. 31. 뮤지컬 "그날들", 김광석의 명곡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운 스토리 제목 보고 운동권 이야기인 줄 알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더 감동이 깊었을 것이다. 박종철 군 이야기라든다. 김광석의 노래가 그 시대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뮤지컬 '그날들'은 창작 뮤지컬이다. 아, 진짜 스토리가 아쉬워도 너무 아쉬웠다. 경호원 두 명과 통역사 한 명이 주인공인데, 아니 왜 안기부가 통역사를 죽이냐고. 그 이유는 어디에도 안 나오고, 경호원 두 명의 캐릭터도 분명하지 않았다. 이 뮤지컬을 보면서 '노트르담 드 파리'나 '레미제라블'이 왜 그렇게 대작인지 바로 이해가 갔다. 캐릭터가 분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날들'의 캐릭터 세 명은 딱히 인상적인 부분이 없었다. 대통령 딸래미도 영 이해 안 가고 어색. 그래서 1부를 볼 때는, 아니 스토리가 왜 이래, 내내 중얼거리며 보다가 2부에서.. 2023. 10. 27. AI가 할 수 없는 일 이틀간 감을 땄다. 모친 소유의 밭인데 감나무가 많다. 집에서도 가깝고 양지 바른 반듯한 땅이다. 시지에서 얼마 남지 않은 그린벨트에 있는 이 땅을 사자마자 아빠가 병 나서 돌아가셨었다. 여기서 한 번도 농사를 못 지으셨고 모친이 졸지에 땅을 떠맡게 되었다. 농사 지은 지 7년 넘어야 팔 수 있어(세금 문제) 감나무를 좍 심었었다. 상품성이 있는 큰 거부터 골라서 따고 그 다음에 중간 사이즈를 땄다. 작은 건 더 크라고 남겨뒀고. 감 한 알 한 일을 다 손으로 따야한다. 이런 건 AI가 못한다. 딱 몇 센티 기계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다른 것과 상대적 비교에 의해 순간순간 감으로 하므로. 우리가 먹는 모든 과일이 이렇게 사람의 손을 일일이 거친 것들이다. 앞으로도 기계가 대체하기 어렵다. 감을 따다가 .. 2023. 10. 15. 축복장과 명품 __ 서울 순례길 완주 축복, Blessing, 누구나 삶의 축복을 희구한다. 당신의 삶을 축복합니다. 얼마나 다정한 말인가. 축복은 복을 빌어준다는 뜻이다. 저주의 반대말이다. 완주하면 '축복장'을 준다길래 거기 혹해서 9월에 서울 순례길을 완주했다. 원래 걷고 싶었던 길이지만, 축복장이 동기 부여에 큰 역할을 했다. 종이 쪼가리 하나 받으려고 1박 2일 두 번, 총 나흘을 서울에서 보냈다. 아마 중세 때 면죄부도 잘 팔렸을 것 같다. 뭐랄까, 그냥 삶에 새로운 기운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올해 좀 침체될 만한 사건사고들이 있었다. 무사히 축복장을 받고 돌아가는 길, 어쩌면 사람들이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것도 자기 삶에 무언가 좋은 기운을 부여하고 싶은 게 아니겠나 싶었다. 명품을 사고 싶은 심리와 축복장을 받고 싶은 심리.. 2023. 10. 15. 거실에서 낙엽을 쓸다 아침을 낙엽을 쓸며 시작한다. 집 마당이 아니라 아파트 거실에서. 주범은 고추나무다. 씨앗에서 시작한 녀석이 몇 달 새 큰 나무로 자라길래 관상용으로 최고다 했는데, 왜 실내에서 안 키우는지 알았다. 가을이 되니 날마다 잎을 우수수 떨어뜨린다. 집에서 왜 고추를 키우냐고? 전직 농부이자 영혼의 꿈이 농부인 D 때문이다. 고향은 멀고 대구엔 한 뼘 땅도 없는 이 정신적 농부는 집에서 방울토마토를 비롯해 고추, 참외 같은 것만 기른다. 실내용 식물과 달리 정글처럼 금세 무성해지는 이 먹을거리 식물들이 올여름 우리 거실을 푸르게 만들었었다. 마치 밀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는데 방울토마토는 다 정리하고 이제 고추가 거실을 지키고 있다. 고춧잎이 다 떨어지면 늦가을 혹은 겨울이겠지. 아침마다 거실을 쓸며 계절을 .. 2023. 10. 10. 이전 1 2 3 4 5 6 ···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