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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547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 __ 21세기는 왜 폭력적인가 100페이지 남짓한 저자의 다른 책에 비하면 꽤 두꺼운 책이다. 그래도 200페이지를 넘지 않으니 일반적인 철학서에 비해서는 얇지만. 이 책이 조금 더 두꺼워진 이유는 역사적으로 행해진 폭력의 양상을 시대별로 개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리적 폭력에 대해 비판적이다. 죄인을 광장에서 참수하고 전시했던 절대권력 시대도 아니고 감옥, 병동, 수용소 등으로 개인에게 규율을 강제했던 산업사회 초반도 아니다. 후기산업사회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수반하는 외적 강제나 규율이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폭력이 줄어든 평화로운 시대인가? 저자의 대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어느 시대보다도 폭력이 증가한 시대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 강하고 전방위적이며 음험한 폭.. 2024. 2. 18.
정보의 지배 / 한병철 __ 데이터 가축, 소비 가축이 된 인류 한병철의 책을 읽노라면 100페이지의 얇은 책에 늘 간지를 잔뜩 끼워넣게 된다. 그만큼 다시 곱씹고 싶은 함축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예전 책은 얇고 가벼워 백에 넣고 다니거나 지하철 등에서 보기 참 좋았는데, 요새는 다 하드커버로 나와서 안 사고 빌려본다. 하드커버로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람. 저자는 21세기 인류를 가축에 빗댈 때가 많다. 왜 노예가 아니고 가축인가. 노예는 주인에게 저항하지만 가축은 저항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을 만큼 완전히 체제에 길들여졌기 때문. 저자가 보기에 지금 인류는 데이터 가축, 정보 가축, 소비 가축이 되어 있다. 정보가 과잉 생산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자기를 공연하는 데 혈안되어 있고 그 공연의 방식은 소비이다. 인플루언서들은 소비가 자기실.. 2024. 2. 18.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김용옥 사람이 선하게 산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경우도 많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에 억울함이 쌓인다. 이 난제를 철학과 종교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칸트는 신을 요청한다. 신이 미래에 보상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도덕의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에 반해 불교가 요청하는 것은 윤회다. 현생보다 더 광대무변한 시간을 요청한다. 나의 행위의 결과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더 멀고 긴 시간 속에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전생과 후생을 미신적인 개념으로 잘못 이해했기에 불교의 이 시간관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불교 시간관의 본질은 우리 행위의 인과관계가 우리의 앎을 넘어서서 드넓은 맥락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인과관계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삶을.. 2024. 1. 3.
인간의 시간 / 이강산 _ 올해 읽은 최고의 에세이 우리나라 절대 빈곤층이 사는 재개발지역, 그 재개발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몰리는 여인숙의 0.8평 짜리 달방. 냉난방이 전혀 되지 않고, 부엌도 없고, 좁고 불편한 공동 세면장과 공용 화장실이 딸린 집. 모기장을 치지 않으면 잠을 못 잘 만큼 바퀴벌레가 들끓고 폭우라도 오는 날이면 하수구가 넘쳐 오수가 방을 덮치는 집. 11가구가 모여 사는 그 대덕여인숙에 저자는 365일을 입주한다. 시대의 기록, 다큐 사진을 찍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면서 저자는 깨닫는다. 사진보다 그들의 일상을 도와주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작가는 사진은 잠시 잊고 그분들을 도와주면서 여인숙의 진짜 식구가 되고 친구가 된다. 그렇게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되면서 작가는 비로소 사진을 찍게 되고, 365일이 다 끝나고 나.. 2023. 12. 21.
소설, 가장 깊은 소통 __ 다다다 / 김영하 다다다, 가 뭔가 했더니 보다, 읽다, 말하다, 세 권을 합본한 책이다. 작가는 소설이 가장 깊은 수준의 소통이라 말한다. 대화는 깊은 소통에는 한참 이르지 못한다고. 들뢰즈도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그리고 타인의 본질에 다다르는 순간은 예술만으로 가능하다고. 가볍게 책장을 넘기며 이런저런 사색을 하기 좋은 책이었다. 2023. 12. 13.
가짜 노동 / 데니스 뇌르마르크 외 여기 덴마크의 한 의사가 있다. 병원의 새 진료 기록 프로그램 도입으로 환자를 만날 때 자그마치 142개의 설문에 답을 해야 한다. 답을 입력하지 않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최근에는 손 씻기 과정 연수까지 받았다. 30년간 외과의사로 일해서 손을 제대로 안 씼었다면 자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가 자조적으로 말한다. 현대에 들어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은 점점 고역이 되고 있다. 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이해하기 힘든, 어떨 때는 그저 눈에 보이는 과시용에 불과한 온갖 엑셀 표와 서류상에만 의미 있는 보고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난 학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웬걸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심지어 대학 교수들까지. 저자는 이 모든 것을 '가짜 노동'이라 이름 짓는다. .. 2023. 12. 13.
법구경을 펼치며, 풍요의 시대에 고통이 많은 이유 를 읽고 넘 감명 받아서 불교 관련 책들을 다시 들쳐보는 참이다. 집에 뭐가 있나 보니 98년 발행된 법구경이 있다. 그때 이후로 읽어본 적이 없었네. 지금은 절판된, 법정 스님 번역이다. 이 작은 책을 가볍게 훑어보고 알았다. 이 풍요로운 현대사회에 왜 고통이 많은가를… 현대에 고통이, 특히 심적 고통이 만연한 이유는 현대 사회에 쾌락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고통과 쾌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존재한다. 우리를 자극하고 유혹하는 쾌락이 너무 많기에 그만큼 그걸 얻지 못하는 고통도 크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도파민 중독'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크고 작은 쾌락에 중독되어 그것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우울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법구경에 좋은 문장이 많았지만 요번엔 이게 젤 기억에 남아 옮겨 적어본.. 2023. 12. 2.
[청년 붓다 / 고미숙] &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 카렌 암스트롱] 익히 아는 인물의 이야기가 이렇게 흡입력 있게 읽히다니.. 붓다의 새롭고 놀랍고 독창적인 생애와 사유에 반했다. 다 읽고 보로부두르가 떠올랐다. 내가 청년 붓다의 이미지를 처음 만난 곳이다. 우리나라 불상의 부처님 이미지는 중년의 살집 많은 아저씨에 가까운데 보로부두르 불상들은 하나같이 청년 학승이었다. 구도의 순수한 열망이 서린 얼굴 표정이 너무 아름다워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고미숙 씨의 (청년 붓다)는 붓다의 생애를 청년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한 책이다. 사실 출가는 세간의 풍속과 기존의 모든 이념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청년의 열정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붓다가 그런 인물이었다. 귀족 출신으로 모든 걸 담대히 버리고 깨달음의 길을 찾아나섰다. 인간의 삶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하는 이유를 밝히.. 2023. 11. 26.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 / 향봉 어느 젊은 부부가 있었다. 일곱 살 외아들이 귀신이 보인다며 헛소리하고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병원도 가고 귀신 쫓는 굿을 해도 소용 없었다. 다른 무당을 찾아가니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하는 사주라고 했단다. 향봉 스님은 그 아이 부모에게 큰 절을 한다. 이 아이는 자라서 나라의 큰 일꾼이 될 아이라서 그런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절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이 어머니는 당황하여 이 아이가 몇 살까지 살 수 있냐고 묻는다. 스님은 답한다. 백새에 이를 만큼 장수를 타고난 아이라고. 그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스물 두 살인 지금 의대에 다니고 있다 한다. 한 시간이면 후루룩 다 읽는 가벼운 에세이지만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잔뜩 박혀 있다. 도력이 높은 큰스님의 책이라곤 믿기지 않.. 2023. 11. 20.
헤아려본 슬픔 / C. S. 루이스 헤아리다, 이 단어를 생각케 한 책이다. 슬픔을 헤아리다… 슬픔에 압도되거나 눌릴 때가 많지 슬픔을 곰곰 헤아리기란 어렵다 저자는 엄청난 슬픔과 상실 속에서도 그 슬픔을 헤아리고 기록한다. 그래서 작가겠거니 했다. 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과정이므로. 2023. 11. 17.
사랑과 혁명 1~3 / 김탁환 1권을 보면서 다 읽는데 적어도 일주일 이상 걸리리라 생각했다. 말이 세 권이지 1권은 600페이지, 2권 3권도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이라 보통 책으로 5권 분량은 족히 넘는다. 하지만 시대적, 공간적 배경과 각 인물들의 개인사가 등장하는 1권만 다소 천천히 읽었을 뿐, 2권부터는 정신없이 읽었다. 이 이야기가, 각 인물들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라는 철학적이고 무거운 소재를 이토록 빠져들어 읽게 하다니 역시 대작가다운 필력이었다. 곡성을 배경으로 천덕산, 동이산, 순자강... 곡성 들판과 강줄기와 이름 모를 숱한 골짜기들을 내가 직접 보듯이 생생한 감촉을 느끼면서 19세기 삶의 공간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옹기 굽는 덕실마을의 교우촌의 삶도 인상 깊었지만.. 2023. 11. 1.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 김응교 제목을 보고 글쓰기 책인 줄 알았다. 아니다. 문학작품을 그것의 첫문장을 바탕으로 해설하는 책이다.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의 장점은 첫문장과 함께 그 유명한 고전 하나하나를 개성 있게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 소설과 지금 인기 있는 작품도 몇 등장하여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에 나오는 첫문장을 발췌해둔다. ## 거기 누구냐? 아냐, 내가 묻는다. 거기 서, 너 누구냐. (셰익스피어, 햄릿)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사람들이 강이라고 하거나, 우유가 흘러내린 흔적이라고 하는 이 뿌옇고 하얀 게, 사실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하지만, 여러분은 말하시겠죠. 우리는 당신에게 여성과 픽션에 대해 강연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도대체, 제가 말하려는 '.. 2023. 10. 26.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 파울 페르하에어 저자의 전작, 에 비해서는 가독성이 떨어졌지만, 권위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십분 이해할 만하다.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권위의 역할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권위는 우리가 속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조율하고 통제하며 사람들의 행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경제'를 제외한 모든 전통적인 권위가 힘을 상실했다는 것인데, 저자는 그 전통적인 권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 권위들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영구히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권위의 상대성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과거의 권위에 무조건적인 향수를 가질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 권위들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교화하고 사회를 안정시켰으나 여성을 비롯하여.. 2023. 10. 19.
사물의 소멸 & 리추얼의 종말 / 한병철 에리히 프롬이 우리 시대를 봤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소유' 대신에 '존재'를 설파했던 철학자가 지금을 봤다면 '소유' 대신 '이상한 존재'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았으리라. 사물 대신에 정보가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 사물은 삶을 안정시키지만 정보는 우리를 정처없이 배회하게 한다. 정보는 사물과 타자에 깃든 시간, 촉감, 불가해성이 없다. 정보가 넘쳐나고 모든 게 명료하지만 세계는 점점 멀어지는 역설의 시대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말을 건다. 리추얼은 또 어떤가. 공동체의 의례 혹은 시간적인 형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 리추얼은 흘러가는 시간에 마디를 맺어줌으로써 시간을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집으로 만들어준다. 리추얼이 사라진 시대에는 개인의 자기 표현과 가식 없는.. 2023. 10. 18.
백년 동안의 증언 / 김응교 _ 간토대지진과 그 이후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발생한 진도 7.9의 간토대지진. 같은 날 오후 3시부터 학살극이 시작된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일본어 발음 중 까다로운 것을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 가해진다. 자연이 초래한 어마어마한 재앙은 그 이상의 참혹한 비극을 낳는다. 지금도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 때문에 벌어진 학살이었다고 이야기할 뿐 그 유언비어의 진원지는 말하지 않는다. 불안과 두려움을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분출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막으려 했다는 것을. 그래서 학살된 사람 중에선 일본인도 포함되었다. 일본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이 주요 표적이 되었고, 도쿄 발음을 잘 못하는 오사카 사람도 끼어 있었다. 평소 국가.. 2023.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