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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이야기209

강진 사의재에서의 하룻밤 한 남자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명민했고 성균관에서 문재를 드날렸으며 과거 급제 후에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입신의 길을 걸었던 인물.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남해 바다 끝, 머나먼 강진 땅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가 고작 마흔이었다. 정조가 승하한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동생(정약종)은 이십대의 나이로 순교하고 그와 형(정약전)은 배교하여 간신히 사형을 면하여 형과는 살아서는 만나기 어려운 흑산도로 길이 갈라지고 그 자신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강진의 한 주막에 당도했던 남자,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강진에서 나는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만 기거한 줄 알았는데 그의 첫 흔적이 남아있는 '사의재'라는 매우 인상적인 장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김영랑 생가 앞의 한식당이 4인상만 가능해서 부근에.. 2017. 10. 3.
가해자의 참회가 없는 나라 - 제주 4.3 평화공원 여행지에서 우리의 경험을 좌우하는 것은 장소의 특성보다는 여행의 방식일 때가 많은 것 같다. 내게는 제주가 그러한 곳이었다. 올레 1코스에서 15코스까지 제주 해안선의 절반 가량을 천천히 도보여행을 했는데 바람과 바다가 빚어낸 해안선의 절경에 취하고 소박한 마을 골목길이 주는 평안을 맛보는 데서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나쳐간 마을과 야산 곳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역사의 흔적을 아울러 만났다. 일제강점기의 땅굴과 4.3 사건의 흔적들이었다. 도보여행이 선물한 것은 역사에 대한 '감각'이었다. 역사를 추상적 사실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로 맞닥뜨리게 한 곳이 제주였다. 4.3 평화공원 방문은 그로부터 6,7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제주 시내가 아니라 절물자연휴양림 부근에 있어서 남부 해안선을 따.. 2017. 3. 12.
지리산을 품다 - 하동 이병주 문학관 하동군 북천면은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경전선 북천역이 지나는 이곳은 가을이면 코스모스 축제로 유명한 곳이지만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병주 문학관 때문이었다. 나림 이병주 선생의 소설 '지리산'을 읽고 한번쯤 가봐야지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문학관은 북천면에서도 더욱 아늑한 이명산 산자락 아래, 앞으로는 주변이 조망되는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축제는 끝났지만 주변 밭에 흐드러진 코스모스가 가을 정취를 전했다. 실내에는 기대했던 것만큼 자료가 많지는 않았다. 그저 선생의 삶의 자취를 한번 훑어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전시물보다는 주변 자연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더 마음이 가는 곳이 이병주 문학관이었다. '지리산'은 일제 말과 해방 공간을 배경으로 빨치산 투쟁을 다룬 소설이다. 내게는 지리산에 얽.. 2017. 2. 12.
2016. 11. 12.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 광장은 거대한 축제장이었다. 시청역에서 광장으로 나오는 모든 길이 인파로 가득했다. 출입구마다 색색의 깃발을 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환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헤쳐서 숙소로 잡은 남대문 근처의 호텔 프레이저플레이스에 도착했다. 프레이저플레이스 앞에서는 마침 농민들의 한마당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거리 행사를 마친 농민들이 각 지역별로 바닥에 둥글게 자리를 잡고 준비해온 음식과 막걸리로 요기를 하고 있었다. 대학 MT 같은 분위기였다. 호텔 직원은 지금까지 숱한 시위를 보았지만 이렇게 호텔 바로 앞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찬 것은 처음 본다고 했다. 고속도로가 막혀 친구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 .. 2017. 1. 21.
화엄 세상을 향한 염원을 담은 곳 - 지리산 화엄사 지리산 화엄사까지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다. 대구에서 남원, 남원에서 구례, 구례에서 화엄사까지 이동에만 오전이 걸렸다. 다소 불편하고 느린 여정이었지만 마을과 마을을 하나씩 거쳐서 목적지에 이르는 즐거움이 있었다. 역이나 터미널은 한 도시나 마을의 관문이어서 그곳에서 받은 조금씩 다른 인상들도 여행의 소중한 일부가 된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광한루가 가까워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강의 젖줄 요천과 광한루를 한 바퀴 산책해서 좋았고 남원에서 구례까지는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이어서 좋았다. 지리산 자락은 그 어디건 나를 감동시키지 않는 데가 없지만 그 산세의 웅장함과 더불어 화엄사의 위용과 아름다움도 기대 이상이었다.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 보제루 옆을 돌아 경내에 들어서면 국보 67호 화엄사 각.. 2017. 1. 21.
여수 묘도에서 이순신의 자취를 보다 여수에서 내 마음에 고이 남은 곳은 유명한 여수 밤바다도, 주차할 곳을 찾느라 애먹었던 돌산공원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줄을 길게 서서 올라갔던 오동도 전망대도 아니었다. 관광지 여수가 아닌, 여수가 본래 지닌 호젓한 정취를 가감 없이 느껴본 곳은 작은 섬, 묘도에서였다. 과거엔 배가 다녔겠지만 이제는 이순신대교가 묘도를 사이에 두고 여수와 광양을 잇고 있다. 이순신대교를 시원하게 달려서 묘도에 도착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묘도의 정상,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던 봉화산이었다. 봉화산은 산 중턱까지만 차가 갈 수 있어서 정상까지는 한적한 산길을 30분 정도 걸어올라가야 했다. 264미터의 작은 산이지만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놀라웠다. 묘도의 오래된 다랭이논과 주변 다도해의 풍경도 절경이었지만 남으로는.. 2017. 1. 19.
제주가 간직해온 말들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어떤 특정한 장소의 아름다움보다는 제주가 오랫동안 품어오고 키워온 말들이 내게 선물로 다가왔다. 사라오름, 아라오름, 사려니숲길, 가시리, 곶자왈, 다랑쉬오름, 따라비오름, 쇠소깍... 제주땅 곳곳을 채우고 있는 이 정겹고 고운 이름들을 가만히 음미하면서 이 이름들을 지은 옛사람들의 마음씨도 이만큼 곱고 다정했으리란 생각을 해보고, 우리 삶의 자리가 좀 더 어여쁜 이름들로 가득차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육지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우리 옛이름들을 변방의 작은 섬이 간직하고 있음이 반갑고 신기했다. 2017. 1. 2017. 1. 16.
두 개의 풍경, 여수 만성리 때로는 하나의 광경 혹은 이미지가 그 도시에 대한 인상을 결정한다. 여수 만성리의 바닷가 풍경이 내게는 그러했다. 일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서 일제시대에 건설되었다는 을 통과하면 도로 오른편으로는, 폐선을 활용한 레일바이크 길과 그 너머 푸른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고 도로 왼편으로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작은 표지판과 함께 만성리 학살 유적지가 자리해 있다. 여수순천 사건 직후 1949년 죄없는 민간인 250명이 인근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 총살당하고 불태워져 이곳에 암매장되었다.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는 곳은 물론이고 그 근처에 있는 형제묘 또한 누군가 두고간 꽃이 그 마음을 말해줄 뿐 아직 주변 정리가 되지 않아 거의 방치되다시피 버려져 있다. 페인트칠이 벗겨져가는 안내 표지판에는 .. 2016. 10. 24.
아직 오지 않은 말들 - 광주 답사 여행 가을비가 살짝 흩뿌리는 날,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9월 초순, 대기가 아직 여름의 더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 날씨는 온화했고 내리는 비도 부드러웠다. 가는 동안 구름과 안개가 산과 마을을 휘감고 있었는데, 도착했을 때는 비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하늘이 트이기 시작했다. 3시간 반을 달려 광주 유스퀘어에 도착해서 마중나온 친구를 만났다. 5. 18 관련 사적을 돌아보고 싶다는 내 이야기에 그는 광주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며 고맙게도 하루의 여행 일정을 세세하게 짜놓았다. 맨 처음 간 곳은 5. 18 자유공원이다. 당시 교직에 계셨다가 이제 은퇴하신 문화해설사 선생님으로부터 열흘간의 항쟁 일지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설명 도중 그분의 목소리가 간간이 떨렸다. 그 목소리의 떨림에서 그 시간이 그분의 마음에 어.. 2014. 4. 13.
그 이름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에 관하여 - 광주에서 친구의 안내로 공원 지하 추모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벽면 가득히 새겨진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들의 이름. 아이, 소녀, 청년, 어른의 이름. 그들의 몸은 사라지고 벽에 이름으로만 남은 이들... 80년 광주의 이름들이었습니다. 한나절 동안 광주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내 마음에 가장 강한 이미지로 남은 건 5. 18 기념공원에서 만난 이 이름들이이었어요. 뒤에 들른 5. 18민주묘지에서 이 이름들 각각의 얼굴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이 더 애틋했습니다. 그리고 이 낯모를 이름들로부터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의 정체를 알지 못해 더듬거렸어요. 이 이름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눈을 아프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름들 .. 2013. 9. 10.
사람을 꿈꾸는 곳 - 봉하마을에서 4년만에 다시 봉하를 찾았습니다. 대통령이 잠드신 너럭바위 앞에 도착했을 때, 제 마음에 차오른 것은 평온함이었어요. 봉분을 높이 세운 왕의 무덤과 달리 평평한 대지, 그만큼 낮게 펼쳐져 있는 무덤. 한참을 서 있었는데 마음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습니다. 그 평온함은 그분의 치열한 삶이 남긴 여백이자 자취 같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재능과 능력과 사랑을 다 쓰고 간 삶이 남기는 그런 평온함이예요. 삶에 대한 평가는 어떤 정책을 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성공이나 실패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으로 살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평온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삶을, 우리의 재능을 다 쓰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삶을 소진시키며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일 거.. 2013. 8. 18.
표지를 따라 걸으며 - 운봉/인월 구간 2코스 시작해서도 둑방길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띄우며 람천에서 한동안 놀았다. 나는 둑방길 위에서 쉬느라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시 길을 나설 즈음에야 물에 다들 빠트렸으면 시원해졌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학생들이다보니, 남자 선생님이 왔으면 애들이 더 재밌었겠다 싶었다. 지리산둘레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둘레길 표지판이 잘 갖추어져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표지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누군가가 만든 길을 따라 걷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구나. 길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 길을 따라가보는 것도 괜찮았다. 어떤 길을 만들지, 혹은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갈 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또한 같은 길을 가더라도 길에서 본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삶은 우리가 길에서 목격한 .. 2011. 9. 24.
이 길에 특별한 게 있다면 - 주천/운봉 구간 지리산 둘레길은 제주 올레만큼 예쁘진 않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절경이 길마다 속속 숨어 있는,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풍광을 지닌 올레길에 비한다면 지리산 둘레길은 다소 밋밋하게 여겨질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길이 좋았다. 올레만큼, 아니 올레보다 더 좋기도 했다. 내륙을 지나면서 마을과 마을로 끝모르게 이어져 있는 길은 화려하진 않으나 오래 묵은 술처럼 깊은 맛이 있다. 경치는 여느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우뚝한 지리산이 그곳에 있는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위엄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행정마을에서 1구간의 끝 운봉마을까지는 둑방길과 농로가 번갈아 나왔다. 둑방길 옆으론 내가 흐르는데 손을 댄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편안하다. 길은 .. 2011. 8. 31.
구룡치 세 글자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 주천/운봉 구간 지리산 둘레길 1~2구간을 걸었다. 주천에서 인월까지 약 26km다. 몇 년 전 길이 처음 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가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초창기엔 게시판에 잡음이 많았다. 외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마을 주민들도 있었고(땀흘려 농사 짓는 옆으로 한가하게 구경하며 걷는 사람들), 도시의 소음이 싫어서 귀농했는데 자기 집 앞으로 수백 명이 지나간다며 항의하는 이도 있었다. 지리산은 관광지 제주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길을 내는 것이 그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오지 마을마저 훼손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러던 중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자그마치 세 군데서나. 각 지자체가 돈에 눈이 멀어 벌인 짓이었다. 찬반 논쟁이 뜨거울 무렵, 한 다큐 프로를 보았다. 주.. 2011. 8. 18.
"고통을 즐기는 거지" - 한라산 신년 야간산행 2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얗게 쌓인 눈 때문에 칠흙같이 어둔 밤인데도 산이 밝다. 우리들 마음도 그 무엇보다 밝았다. 12월 31일 내내 폭설로 삼각봉 대피소까지만 갈 수 있다고 했는데, 밤 10시를 기해서 정상까지 등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 없는 고요한 산속, 쌓인 눈이 그 침묵의 깊이를 더해주는 시간이었다. 눈길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이 산행을 위해 일박 이일의 시간을 내어 공항에서 날아온 아저씨는 요즘 경기가 하도 안 좋고 힘들어서 무언가 희망을 하나 건져보려고 한라산에 왔다고 했다. 동행한 또 한 분의 할아버지는 지금 이 나이에도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을 시험해 보고도 싶고, 자녀들 잘 되라는 기원도 하려고, 산행에 나섰다고 하셨다. 이 분들께 일출을 보기 위한.. 2010.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