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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눈보라 속에서 베이스캠프를 향하여 - Annapurna Sanctuary 9 3700m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에서 4130m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까지 두 시간 반 걸리는 길은 (우리는 세 시간 넘게 걸었으나) 트레킹 코스의 하일라이트라 할 만했다. 어쩌면 이 몇 시간의 경치를 보기 위해서 일주일씩 걸어서 이곳에 당도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곳의 풍광은 압도적이었다. 히말라야가 아니면 그 어떤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스케일. 눈보라 때문에 주위는 온통 희뿌연 안개 속이었으나 바람이 휙 몰아칠 때마다 나타나곤 하던 눈덮힌 황량한 벌판의 모습에 나는 몸을 떨었다. 여기에는 아무 생명체도 살지 않는다. 동물도, 식물도, 사람도 없다. 오직 눈과 비, 바람과 별빛만이 닿을 수 있는 곳. 그래서 인간의 땅이 아니라 신의 땅. 길은 완만한 경사였지만 고소 때문에 한 발짝 떼.. 2008. 4. 11.
[네팔] 사람을 짐승처럼 부리는 게 괜찮으면 - Annapurna Sanctuary 8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롯지 지붕 위로 눈이 두텁게 쌓여 있다. 함께 묵었던 일행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출발했다. 길을 갈수록 숲은 자취를 감추고 삐죽삐죽한 바위산이 우리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골짜기 뒤에서 구름이 우리를 향해 점점 다가온다 했더니 어느새 구름은 우리 걸음을 추월해 버렸다. 주위는 삽시간에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였고 눈 때문에 걸음은 두 배나 힘들어졌다. 맨몸으로 가도 이렇게 어려운데 배낭도 아니고 엄청난 짐을 머리에 매단 네팔인 포터도 있었다. 캠핑하는 사람들의 짐을 나르는 포터들이었다. 여행서 어디선가 본 구절이 생각났다. '사람을 짐승처럼 부리는 것이 괜찮으면 캠핑을 하라.' 이 모습을 보니 캠핑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가스통을 짊어진 네팔 소년도 몇 명 만났.. 2008. 4. 10.
[네팔] 새가 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 Annapurna Sanctuary 7 촘롱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맞은 편 언덕 시누아까지 가는데 오전 내내 걸렸다. '렙상 삐리리 렙상 삐리리 우 데라 잠끼 다 라마 바썸 렙상 삐리리~~' 가이드가 민요를 흥얼거린다. 우리 나라의 아리랑처럼 유명한 산 노래란다. '새가 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날아다니리....'라는 뜻이라는데, 노랫말이 내 마음과 꼭 같다. 날개가 있다면 저 건너편 언덕으로 훌쩍 날아갈텐데, 우리는 가파른 절벽을 내려와서 강을 건너고, 내려온 만큼 또 한참을 올라가야 건너편 언덕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을 오르내리던 네팔 사람들도 새가 되고 싶었으리라. 까마득한 언덕길..... 히말라야에서는 5000미터까지는 모두 언덕이다. 6000미터가 넘어야 비로소 산으로 대접 받는다. 점심을 들기 위해 시누아의 롯지에 들어섰을 때.. 2008. 3. 22.
[네팔] 가도 가도 끝없는 길, 고레파니에서 촘롱 - Annapurna Sanctuary 6 고레파니에서 촘롱에 이르는 길, 두 개의 큰 강과 계곡을 건너고 이삼천미터 쯤 되는 경사면을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인 줄 알았다면 하루 만에 걸을 엄두를 내진 못했으리라. 푼힐에서 내려와 짐을 챙겼다. 따뜻한 난로가 있는 고레파니를 떠나자니 아쉬운 마음이 일었지만, 일정이 촉박해 바로 길을 나섰다. 능선길에서 안나푸르나 연봉들을 다시 만났다. 우리의 마지막 도착지는 저 멀리 보이는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마차푸차레 사이의 베이스캠프. 그 관문격인 촘롱에 오늘 닿아야 한다. 숲길로 접어들자 간밤에 내린 눈으로 길은 얼어붙어 있다. 간간이 비치는 햇살에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길은 완전히 빙판이 되었다. 미끄러지기를 수 차례, 어렵게 눈길을 통과하자 깊은 정글이 펼쳐진다. 호젓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허파.. 2008. 3. 10.
[네팔] 푼힐, 구름 너머 안나푸르나 - Annapurna Sanctuary 5 새벽 다섯 시, 창밖을 바라보니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별빛이 쏟아진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번쩍이는 별들이었다. 해돋이를 볼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음이 설렜다. 추위에 대비해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세상에, 간밤에 눈이 살짝 내렸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밟으며 푼힐을 향해 걸었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숨이 많이 찼다. 길을 가는 동안 구름과 안개는 점점 많아져서 3200m 푼힐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날은 밝아왔지만 산도 해도 볼 수 없었다. 날씨가 맑다면 이곳에서는 해가 떠올라 병풍처럼 죽 늘어선 설산을 하나하나 차례로 비추는 장관을 만날 수 있다. 겨울은 건기라서 대개 맑은 편인데 요즘 히말라야 날씨가 심상치 않다. 트레킹 하면서 눈을 밟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추워서.. 2008. 3. 9.
[네팔] 산을 믿는 사람들 - Annapurna Sanctuary 4 히말라야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혹시나 해서 차창을 돌아보니 그새 안개가 걷히고 달이 휘영청 빛나고 있었다. 달빛 아래로는 희고 푸른 기운을 내뿜는 설산이 고요히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검푸른 밤하늘 사이로 솟아오른 산의 기운이 너무 장대해서 마치 그가 잠들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네팔은 힌두교도가 많지만 티벳과 마주하고 있는 히말라야 일대는 대부분 불교도이다. 안나푸르나 인근 마을이 고향인 우리 가이드와 포터도 불교도였다. 옆에 앉은 드니스의 가이드에게 종교를 물어보았다. 종교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무엇을 믿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한다. “내가 믿는 것은 산이다.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것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나는 눈에 보이는 저 산을 믿는다. 자연을 믿는.. 2008. 3. 2.
[네팔] 여행과 현실 사이 - Annapurna Sanctuary 3 울레리에서 고레파니 가는 길. 가이드가 가장 쉬운 날이 될 거라고 말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네 시간 반이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고레파니'라는 입간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뛴다. 7년 전 여기에 처음 도착했을 때 병풍처럼 늘어선 안나푸르나 연봉들을 보고 감격했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 산이 바라다보이는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기대했던 풍광은 나타나지 않았다. 안개가 산 전체를 휘감아 버렸기 때문에. 숲과 계곡을 지나올 때는 조금씩 햇살이 비쳐서 기대를 좀 했는데 날씨는 쉬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가이드가 선택한 롯지는 예전에 묵었던 바로 그 집. 전에는 이 집이 제일 높은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로 집이 한 채 더 들어섰다. 식당으로 들어가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난로를 보자 얼.. 2008. 2. 29.
[네팔] 침낭 때문에 하산을? - Annapurna Sanctuary 2 울레리에서 맞이한 첫새벽,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 때문에 잠에서 깼다. 밤공기가 워낙에 차갑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 하지만 어깨까지 시린 것이 이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낭을 살펴보니 오리털이 아니라 그냥 솜 침낭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간밤에 피곤해서 바로 누웠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포카라 현지에서 대여한 침낭이었다. 스스로 빌릴 수도 있지만 엄마가 염려스러워서 좋은 것을 빌리려고 일부러 여행사 매니저에게 대여를 부탁했었다. 내가 일일이 펴서 점검을 했어야 하는데, 한국 여행사라서 믿고 그러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예전에도 아무 문제없이 좋은 침낭을 빌렸던 터라 지금의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매니저가 우리를 속이고 오리털 대신 값싼 침낭을 빌린 것 같아서 화가 .. 2008. 2. 24.
[네팔] 다시, 안나푸르나에 서다 - Annapurna Sanctuary 1 "산이 거기 있기에 산에 오른다." 유명한 등반가 라인홀트 메쓰너의 말이다. 아마 당분간은 그 누구도 이보다 나은 대답을 들려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 누가 산에 오르는 이유를 딱 집어 말할 수 있을까. 산이 그 깊은 존재감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말 밖에는. 그러니 우리는 산이 거기 있어 산에 오르는 것이다. 큰 산은 저마다 특별한 혼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산에 사는 수많은 생명체가 한데 어우러져 내뿜는 아우라 때문인지, 아니면 산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땅의 기운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 것도 없는 바위산에서도 웅대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일정 부분 신비일 수밖에 없으리라. (산을 오르고 있는 가이드, 포터, 엄마) 세상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산맥 히말라.. 2008. 2. 22.
[태국] 깐차나부리의 소년 '08 나는 결국 그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인사는커녕 그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시종일관 고개를 돌리고 우리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일행 모두는 뗏목을 젓는 소년의 뒷모습만을 기억할 뿐이다. 노 젓는 솜씨는 훌륭해서 물살을 따라 방향을 잘 잡으며 노를 저어갔다. 강물의 흐름을 타고 있어 노를 저을 필요가 없을 때도 소년은 결코 우리를 향해 뒤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뗏목 위에는 여남은 명의 한국인 관광객이 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투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방콕의 마지막 하루를 그냥 까페에 앉아 보내려니 어머니가 심심해하실 것 같아서 현지여행사를 통해서 깐차나부리 일일 트레킹을 신청한 거였다. 트레킹이 아니라 농장 방문이라고 해야 할 만큼 시시한 일정이었다. 그.. 2008. 2. 19.
거리의 탁발승 / 방콕 카오산로드에서 새벽이었다. 카오산 로드는 지난 밤의 열기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에 싸여 있었다. 아침 끼니를 해결해주는 노점상 몇 군데만이 주섬주섬 자리를 펴고 있었고, 여행객 몇 명이 아침을 들고 있었다. 람부뜨리 거리를 빠져나가 공항 버스가 서는 주 도로에 이르렀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는데 어지러이 오가는 차들 사이를 걷고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내 시야에 박혔다. 오렌지빛 장삼을 걸친 맨발의 탁발승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여기저기서 탁발승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낮이나 저녁에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태국은 부처님을 믿기보다는 왕을 더욱 숭배한다고 들었는데, 매일마다 탁발을 하며 아침을 여는 스님들의 모습은 이 나라가 불교국가임을 실감케 해주었다. 잠깐 스쳐간 풍경이지만 이 나라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정.. 2008. 2. 18.
[태국] 방콕 1. 여행자들의 거리, 카오산로드 '08 해가 기울면 포장마차의 등불이 하나씩 켜지고,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방금 배낭을 메고 도착한 사람, 까페에서 시원한 맥주잔을 들이키는 사람,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사람, 물건을 사려고 흥정하는 사람,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사람... 열대의 무더운 날씨 속 '사람'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실로 강렬하다. 방콕은 그간 여러 번 경유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어 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준의 책을 읽고 카오산 로드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카오산 로드,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각양각색의 여행자들이 내뿜는 활력과 에너지다. 히피들의 시대는 갔지만, 그 후예들이 또 다른 종류의 자유를 찾아 전세계에서 속속 모여드는 곳.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넘실거리지만,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젊음의 에너.. 2008. 2. 17.
자기를 바로 봅시다 - 성철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 2007. 10. 14.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말씀보다 더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 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2007. 7. 17.
<완전범죄>, 권력의 편집증적 욕망을 그려낸 영화 완전 범죄 감독 엘리오 페트리 (1970 / 이탈리아) 출연 지안 마리아 볼론테, 플로린다 볼컨, 지아니 산투치오, 오라지오 올란도 상세보기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EBS에서 만난 영화. 처음부터 보진 못했는데, 인간이 지닌 욕망, 특히 권력이 지닌 편집증적 속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배경은 1960년대 이탈리아 로마, 주인공은 사회주의자들, 혁명가들, 좌파들, 데모하는 학생들 등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인물로서 사회 질서를 잡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과대망상증 환자이자 변태성욕자이다. 그는 강력반에서 정치 지도부(우리 식으로는 과거 안기부 쯤 되겠다) 고위직에 오르는데, 자신을 비웃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애인을 살해하고 일부러 자신이 저지른 범행의 흔적을 곳곳에 남긴다. 그러나 갖가지 .. 2007.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