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550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 캄보디아의 한 스님이 쓴 책을 읽다가 불교의 팔정도를 설명하면서 '바를 정'을 흔히 해석하듯이 '올바르게'나 '똑바르게'가 아니라 '능숙하게'로 해석하는 걸 보고 동감했다. 예를 들어, 정견을 '올바르게 보기'라고 옮기면 그러지 못한 사람은 '그릇되게 보는' 게 된다. 반면에 이를 '능숙하게 보기'로 옮긴다면, 그러지 못한 이는 '서투르게 본다'는 의미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그릇되게 보는 사람보다는 서투르게 보는 사람이 낫겠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20대란 뭘 해도 능숙하게 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일에 오래 매달리지 못하는 나이, 즉 서툴러서 쉬 싫증 내는 나이다. pp38 ## 젊었을 때 많이 여행하라는 흔한 말을 뒤집으면,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라는 말이 된다. 나이가 젊.. 2018. 11. 18. 개구리를 위한 글쓰기 공작소 | 이만교 — 글쓰기는 정체성을 변화시킨다 글쓰기 관련 책이 많지만, 일상언어의 한계를 이처럼 선명하게 짚어주는 책은 보지 못했다. ## '낯설게 하기'는 일상의 자동화된 인식을 배제하고, "사물에 대한 감각을 알려진 대로가 아닌 지각된 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즉, 습관적, 관용적, 상투적 표현을 배제하고 지각된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낯설게 하기'이다. 그런 점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는,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작가 자신에게 지각된 그대로 표현하기'다. 일반언어는 누구나 사용하는 관습적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관습적, 관용적 태도를 유지시켜 준다. 반면 문학언어 혹은 창작언어는 화자가 실질적으로 느낀 그대로, 혹은 화자만이 느끼는 그대로 서술한다. 그런 점에서 화자만의 감각과 개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p.. 2018. 11. 12.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이만교 — 씨앗도서와 씨앗문장 찾기 ## 말로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서, 실제로는 좋은 글을 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글을 써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로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 말로는 가난할지라도 자유로운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면서, 언제나 돈과 브랜드에 민감한 채 필수불가결하지 않은 아르바이트 따위로 시간을 허비한다. 말로는 글을 쓰고 싶다면서 예술가의 감수성과 실험정신은 전무한 채로, 중산층의 모럴과 예의바른 행동만을 생활의 모범으로 삼는다. 정말이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포즈만 취하고 있다. pp40 ## 정말로 좋은 글을 쓰고자 원한다면, 어제와 달리 오늘부터는 하다못해 전철 타는 시간에나마 책을 펼쳐 보기 시작할 것이다. 비록 그 변화가 미미하더라도 그러나 최선을 다해 변하.. 2018. 11. 11. 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 고미숙 ㅡ 쓰기 위해서 읽는다 ## 비단 대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이 쓴 책만 읽고, 남이 하는 강의만 듣는 것이 공부인가. 그건 입문과정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공부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다. 주체가 되려면 생산과 창조의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또 누구나 자기 삶은 소중하고 특별하다. 구경꾼으로 살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글쓰기를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언급했듯이, 글쓰기는 담론,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어의 창조다. 언어를 창조한다는 건 곧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야 삶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워밍업은 여기까지! 이제 시작하자. 어떻게? 읽기가 그랬듯이, 쓰기도 역시 질문이 동력이다. 묻는 만큼 쓸 수 있다! 지당한 말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초짜들이 맞닥뜨리는 장벽이 바로 여.. 2018. 11. 7.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ㅡ 시대에 도전장을 내민 청춘의 거침 없는 사자후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일본 인텔리겐차들에게 마르크스는 필독서였다고 한다. 정치, 경제는 물론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와 정반대의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조차 자신이 왜 마르크스를 거부하는지 밝혀야 할 만큼.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 나중에 자민당원이 되거나 천황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이후의 행로가 어떠하든 청년기의 '통과의례'로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한다. 저자 또한 마르크스를 통과한 세대다. 청년들이 더이상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 된 시점은 일본의 거품경제가 시작되고 경제적 풍요가 보편화된 때라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청년들이 마르크스를 통과하지 않게 되면서, 양심이나 사회적 정의, 인간적 품위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를 읽은 세대는 사회에 나오면서 .. 2018. 11. 7.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나는 종종 오션비치에 가곤 했다. 도시 끝자락의 출렁이는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그 긴 모.. 2018. 11. 6. 곤란한 성숙 | 우치다 타츠루 ㅡ 어른(=서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 '죄송합니다'로 끝날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손해든 '없었던 일'로 원상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요. (...) 그렇기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법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동죄형법'이라고 불리는 이 규칙은 미개인이 고안해 낸 잔인한 법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어느 지점에서든 무한책임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에 법률로 '그 이상으로 책임을 소급해서는 안 된다'는 한도를 정해놓은 것입니다.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 상대의 눈을 찌를 권리를 가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 상대의 눈.. 2018. 11. 5. 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 / 야마무라 모토키 향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갈까를 알고 싶다면 이웃나라 일본을 보면 될 것 같다. 일본에서 일어난 모든 사회적 현상이 얼마 후 우리에게도 닥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거품경제가 꺼진 이후 고용 불안정과 사회적 인식 변화 등의 이유로 비혼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이들의 부모는 초고령화되면서 '개호(간병과 수발을 포함해서 스스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이들을 돌보는 일)'가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나면서 가정에 형제가 여럿 있어도 개호의 책임을 대부분 독신 자녀가 떠맡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독신 자녀 개호자들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쉽게 술술 읽히지만 이 문제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임을 느꼈다. 일본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우리 보다 훨씬 앞서 있지만.. 2018. 10. 31.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 우치다 타츠루 외 ㅡ 토론은 최악의 교육 ## 우치다/ 프라이버시는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매너 문제지요. 여자가 집에 오면 모두 예컨대, '아, 잠깐 가게에 갔다 오겠습니다', 혹은 '아, 정원을 청소해야 하는데'라고 말하고(웃음) 자리를 피해 주죠. 그런 배려를 함으로써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고 싶은 쪽이 자력으로 획득하거나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미묘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는 마음 씀씀이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장지와 장지문의 문화에서 프라이버시가 성립할 수 없었겠지요. 유럽의 벽돌로 만든 집 같으면 두꺼운 벽이 있어서 문을 닫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물리적인 조건이 프라이버시를 담보해 주지만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었죠. 그래서 종이 한 .. 2018. 10. 31. 신화의 힘/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 캠벨/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저도 그 이미지를 소중히 여깁니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경우에도 끈질기게 지니게 되는 어떤 곳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사랑의 이미지요. 사람이 .. 2018. 10. 30. 어린왕자, 진짜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 김서영 외 ㅡ 정신분석학으로 들여다본 '어린왕자' 저자가 수업시간에 대학생들과 함께 작업한 내용을 엮었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어린왕자를 분석한 책. 학생들의 독창적 해석에 감탄하며 읽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을 남겨둔다. ## 김은빈 "어느 날 난 마흔네 번이나 해넘이를 보았어!" 이 구절을 우연처럼 마주한 순간, 제일 먼저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라면 마흔네 번이나 해넘이를 보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아뇨, 볼 수 없었겠죠. 어린 왕자는 슬플 때 해넘이를 보며 자신의 슬픔을 곱씹어요. 그것도 마흔네 번이나요. 누구에게나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에요. 숨기고 싶은 부분이죠. 그런 감정이 다소 부끄럽기도 하고, 또 초라해 보이기도 하며, 두렵기까지 하죠. 어떤 생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미성숙한 감정인 것처럼 생각되잖아요. 자신의 그림.. 2018. 10. 20. 질문이 있는 교실 | 전성수 외 ㅡ 좋은 질문의 조건 ## 좋은 질문이란 한 마디로 생각을 촉진하고 사고를 정리해주는 질문이다. 좋은 질문이란 상대방에게 영감을 주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다. 특히 대답하는 사람이 질문받기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것은 창조적이고 뛰어난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질문에 따라 대답도 달라진다. 질문의 수준에 따라 대답의 수준도 달라진다. 질문 능력이란 대답하는 사람이 미리 준비한 사항을 얘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좋은 질문의 조건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질문은 무엇을 묻는지 분명해야 한다. 질문을 할 때 아주 길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질문은 짧고 간결하며 요지가 명확해야 한다. 하브루타를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장황하게 하는 것을 의미.. 2018. 10. 4. 페미니즘의 도전 / 정희진 2005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십 년이 훌쩍 넘은 책이다. 개정증보판을 다시 읽으며 놀랐다. 십 년 전보다 공감 가는 부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머리로 읽었다면, 지금은 한 부분 한 부분이 내 삶의 경험과 얽혀 있는 느낌이다. 페미니즘 분야의 고전이라 할 만하다. ## 나는 성역할 노동을 거의 하지 않으며, 노동 시장에서 남성들과 함께 일하지 않는다. 주로 여성들과 지내는 내게 삶의 억압은 성차별이 아니라 나이, 계급 등 여성들 간의 차이다. 마흔을 앞둔 나는 여성이라는 사실보다 나이 든다는 것이 더 두렵고,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에 자주 분노하곤 한다. 이처럼 여성은 여성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은 계급, 인종, 민족, 나이, 장애 여부,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등의 성정체성에 따라 각기 다.. 2018. 9. 29.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 일탈 욕망은 젊은/부잣집/도련님에게나 가능하다. 그것은 성 해방이며 인간의 성장과 창조를 촉진한다. 자기 세계를 넓히기 위한 남자의 모험이다. 그러나 힘없는 자의 욕망은 역겹거나 최소한 심한 불편함을 준다.(노인의 성과 사랑의 '욕망'을 다룬 영화 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을 보라.) (...)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부르주아는 히피요 문화적 전위지만, 가난한 자가 그렇게 한다면 단지 초라할 뿐이다.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 2018. 9. 25. 스토리텔링 원론 | 신동흔 단순하고 때론 허무맹랑하게 보였던 옛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한 문제 의식과 인류의 원형적 사고를 담고 있는지를 낱낱이 맛보여주는 책. 예전에 이분의 '바리데기' 해석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작업한 '심청전' 해석에 감동한 적이 있어 믿고 보는 저자인데, 이 책 역시 실망하지 않았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이야기가 이렇게 깊이 있는 화두를 담고 있을 줄이야. '소설'과 다른 '설화'의 독특한 매력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 이야기는 그 역사가 매우 길고 오래다. 문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이야기는 존재해왔다. 수천수만 년, 어쩌면 그 이상이다. 인간이 '말'을 하는 순간 이야기는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 내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또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사이의 소통과 교감의 기본 .. 2018. 9. 17.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37 다음